울산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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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울산 김씨(蔚山 金氏) | |
관향 | |
시조 | 김덕지(金德摯) |
중시조 | 김환(金環) |
집성촌 | |
인구(2015년) | 36,225명 (163위)[1] |
1. 개요 [편집]
2. 시조 [편집]
시조 김덕지(金德摯)는 신라 제56대 경순왕의 둘째 왕자이다. 학성(鶴城)을 식읍으로 받고 학성부원군에 봉작되어 울산 김씨 시조가 되었다.[2] 학성(鶴城)은 울산(蔚山)의 옛 지명이다.
사기에 의하면 그는 935년 10월 아버지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신라의 천년 사직을 양위하려하자 불가함을 극력 간(諫)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처자를 버리고 형 태자를 따라 개골산(금강산의 겨울 이름)에 들어갔다고 한다.
일설에는 화엄종에 귀의하여 법수사와 해인사에 드나들며 도를 닦으며 망국의 한을 달랬다고 하며, 승명이 범공(梵空)이라 한다. 이러한 행적들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자세하게 상고 할 수 없다.
사기에 의하면 그는 935년 10월 아버지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신라의 천년 사직을 양위하려하자 불가함을 극력 간(諫)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처자를 버리고 형 태자를 따라 개골산(금강산의 겨울 이름)에 들어갔다고 한다.
일설에는 화엄종에 귀의하여 법수사와 해인사에 드나들며 도를 닦으며 망국의 한을 달랬다고 하며, 승명이 범공(梵空)이라 한다. 이러한 행적들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자세하게 상고 할 수 없다.
3. 세계 [편집]
4. 김온 사후 [편집]
정부인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태종비(太宗妃) 원경왕후와 종자매(從姉妹)인데, 친가가 태종 이방원의 왕권강화 정쟁에 휘말려 피화(被禍)를 입자 아들 3형제를 비롯한 식솔들을 데리고 장성에 낙담하여 새 터를 잡았다.[3] 이후 가문은 산림에서 명리(名利)를 멀리하고 학문과 존심양성(存心養性)에 주력하였다.
22세손 문정공(文正公) 하서 김인후는 필암서원 및 문묘(文廟)에 배향되었으며, 이후 호남에서는 하서 김인후의 울산 김씨 집안을 울김(蔚金)이라 하며 명족으로 불렀다.
하서 김인후 이외에도 문, 무과 급제자, 음사(蔭仕), 은일(隱逸)로 출사한 인사들이 다수 나왔다. 또 나라가 어려운 고비 때마다 분기하여 의(義)와 충절(忠節)을 다하였며, 계유정난, 임진왜란, 병자호란, 구한말의 국난 등에 의인, 열사가 지속적으로 나왔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충신 가문이라 할 수 있다
22세손 문정공(文正公) 하서 김인후는 필암서원 및 문묘(文廟)에 배향되었으며, 이후 호남에서는 하서 김인후의 울산 김씨 집안을 울김(蔚金)이라 하며 명족으로 불렀다.
하서 김인후 이외에도 문, 무과 급제자, 음사(蔭仕), 은일(隱逸)로 출사한 인사들이 다수 나왔다. 또 나라가 어려운 고비 때마다 분기하여 의(義)와 충절(忠節)을 다하였며, 계유정난, 임진왜란, 병자호란, 구한말의 국난 등에 의인, 열사가 지속적으로 나왔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충신 가문이라 할 수 있다
5. 인물 [편집]
5.1. 고려 [편집]
5.2. 조선 [편집]
6. 분파 [편집]
6.1. 장파(長派) [편집]
6.2. 중파(仲派) [편집]
6.3. 계파(季派) [편집]
- 파조(派祖) 김달지(金達枝)[17]
- 김처리(金處离. 1403-1456)
- 김응두(金應斗. 1492-1552)
- 김신남(金信男. 1552-1598)
- 김진호(金鎭祜. 1847-1924)
7. 근·현대 인물 [편집]
8. 돌림자 [편집]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45세 | 46세 | 47세 | 48세 |
口현(賢) | 口조(祖),경(敬) | 방(邦), 지(志) | 口휴(休) | 口환(煥), 口경(景) | 요(堯), 口규(圭), 口기(基), 口규(奎) | 口중(中), 口기(基), 종(鍾), 용(鎔) | 口수(洙), 口주(柱), 口영(永) | 상(相), 원(源), 용(容), 동(東), 인(仁) | 병(炳), 규(奎), 口섭(燮), 口형(炯) | 재(載), 재(在), 진(鎭) | 口구(九), 식(湜), 종(鍾) | 치(治) | 口래(來) | 광(光) | 口표(杓) | 연(鍊) | 口홍(洪) | 병(秉) | 口희(熙) | 노(老) |
9. 집성촌 [편집]
현재 수많은 후손들이 70~80년대 공업화에 따라 광주․서울 대도시로 상경하고 해외로 진출해 있지만, 선산 및 위토 등은 그대로 보유하고 있으며, 봄·가을 선조들의 시제를 모시고 있다.
10. 바깥 고리 [편집]
[1] 대한민국 김씨 중에서 매우 적은 수이다.[2] 학성부원군에 봉해진 기록이 후손 《하서 김인후 가장》 , 《증보문헌비고》, 《조선씨족통보》등에 기록 되어있다.[3] 장성은 울산김씨 집성촌중 하나이다.[4] 고려말 처음 출사하여 삼중대광(三重大匡) 광록대부(光祿大夫) 영도첨의사(領都僉議事)에 이르렀고, 학성군(鶴城君)에 봉군(封君)되어 군호를 하사받았다.[5]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으며,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오르고 학성군(鶴城君)에 재봉군(再封君) 되었다.[6] 봉상대부(奉常大夫) 전공총랑(典工摠郞)을 지냈다.[7] 조선 시대에, 정이품ㆍ종이품 문무관의 아내에게 주던 봉작. 숙부인의 위, 정경부인의 아래[8] 흥려군(興麗君) 김온(穩)의 장자. 수의부위(修義副尉) 좌군부사정(左軍副司正)를 지냈으며, 세종대왕(世宗大王) 내외족(內外族) 육촌계원(六寸契員)이다.[9] 단종(端宗) 퇴위에 벼슬을 버리고 시골로 내려와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10] 의정부 녹사(議政府 綠事), 중부령(中部令)을 거쳐 세조 3(1457) 단종(端宗) 퇴위에 벼슬을 버리고 귀향 후, 단종 승하 소식을 듣고 투신 자결하였다.[11] 흥려군(興麗君) 김온(穩)의 차자. 충좌위(忠佐衛) 중령사정(中領司正)을 지냈으며, 세종대왕(世宗大王) 내외족(內外族) 육촌계원(六寸契員)이다.[12] 하서 김인후의 손자이다. 선조 24년(1591) 종계변무(宗系辨誣)[22]공(功)으로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에 봉해지고, 임진왜란 때 종군(從軍)하였다. 장성 회계사(晦溪祠)에 제향되었다.[13] 조선 개국 초부터 선조 때까지 약 200년간 명나라에 잘못 기록된 조선 태조의 종계를 개록해 줄 것을 주청한 일[14]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선생의 딸이다. 정유재란 때 왜군들에게 잡혔는데, 절개를 지키고자 잡힌 팔을 잘라 버리고 강물에 투신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남편 김남중(金南重)이 잘린 팔 하나를 거두어 맥동 원당 선산에 장사지냈는데 이를 일비장(一臂葬)이라 한다.[15] 조선 후기의 문신, 성리학자[16] 구한말 의병장. 고종(高宗) 강제 퇴위에 격분하여 1907년 9월 장성 수록산(隨綠山)에서 성재(省齋) 기삼연(奇參衍)을 대장으로 하는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결성하여 종사(從事)하였다. 이후 장성, 영광 등지에서 순사주재소, 일본인 상점, 일진회 사무소 등을 습격하였고, 그해 9월 23일 전북 고창 문수사(文殊寺)에서 야습해온 일본군과 싸우다가 북문루(北門樓)에서 전사함에서 전사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전라북도 진안(鎭安) 이산묘(駬山廟)에 배향되었다.[17] 흥려군(興麗君) 김온(穩)의 삼자. 호분위(虎賁衛) 부사정(副司正)을 지냈으며, 세종대왕(世宗大王) 내외족(內外族) 육촌계원(六寸契員)이다.[18] 조선 중기의 의병[19] 본명은 김민정[20] 인촌 김성수가 이 마을 출신이다.[21] 독립유공자 김병로가 이 마을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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